봄꽃을 따라 떠나는 여행
겨울이 지나가고, 바람이 부드러워질 때, 땅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꽃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봄은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는 봄을 바람의 향기로 먼저 느끼고, 또 어떤 이는 새들이 건네는 아침 인사 속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나에게 봄은 언제나 꽃으로부터 온다. 꽃이 피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꽃이 피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모인다. 하지만 나는 인파 속에서 벗어나 조용히 꽃과 마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봄꽃을 따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오직 꽃이 이끄는 대로, 바람이 밀어주는 대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1. 매화 - 봄의 문을 두드리는 꽃
봄의 첫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매화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월의 끝자락, 바람이 차가운 듯하지만 그 속에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서린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매화가 핀다.
매화는 봄이 망설이는 동안 먼저 피어나 세상에 속삭인다. "이제 시작해도 괜찮아." 가지마다 하얀 꽃이 내려앉으면, 겨울은 그제야 자리를 내어준다. 매화를 보러 가려면 남쪽으로 향해야 한다.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 경남 양산의 통도사, 그리고 전북 구례의 섬진강변. 이곳에서는 매화가 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매화꽃이 만개한 날, 나는 섬진강변을 따라 걸었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매화와 닮아 있었다. 강가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매화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그 향기를 따라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도 작은 봄이 피어났다.
2. 산수유 - 노란 물결이 넘실대는 마을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릴 때쯤, 노란 산수유가 그 뒤를 따른다. 산수유는 마치 "겨울이 정말 끝났어"라고 선언이라도 하듯 활짝 피어난다. 봄이 처음이라면, 매화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겠지만, 봄을 여러 번 맞이한 이들은 산수유의 노란 물결을 보며 확신한다.
산수유를 보러 가는 길은 부드럽다. 노란 꽃길이 산자락을 감싸고, 바람도 한결 가벼워진다. 전북 구례 산수유마을, 경기도 이천 백사마을. 이곳은 산수유가 만든 노란 바다다. 노란 꽃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햇살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산수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봄은 그렇게 점점 짙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확 피어나는 것임을.
3. 벚꽃 - 한순간에 피어나는 찬란한 봄
벚꽃은 기다림 끝에 찾아온다. 매화와 산수유가 봄의 시작을 알렸다면, 벚꽃은 봄의 절정을 보여준다. 찬란하고, 눈부시고, 그러나 한없이 덧없는 꽃.
벚꽃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서울의 여의도, 진해의 경화역, 경주의 보문호수, 전남의 강진까지. 전국 어디든 벚꽃이 피면 거리와 산책로가 분홍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벚꽃을 보기 위해 사람이 붐비는 곳이 아니라, 조금은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다.
강원도 인제의 한적한 벚꽃길을 걸었다. 강변을 따라 흐르는 벚꽃잎이 마치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벚꽃잎이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벚꽃은 피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 순간을 붙잡고 싶었지만, 결국 벚꽃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찬란하지만, 덧없이. 하지만 그 순간이 아름답기에 우리는 해마다 다시 벚꽃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닐까?
4. 철쭉 - 산을 물들이는 분홍빛 물결
벚꽃이 지나가면 철쭉이 그 자리를 채운다. 철쭉은 화려하지만, 그 화려함이 강렬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다. 마치 따뜻한 봄날의 오후처럼.
철쭉을 보기 위해 나는 산으로 향했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 경북 비슬산, 전남 영취산. 철쭉이 피는 곳은 언제나 높다. 나는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철쭉은 산을 따라 물결처럼 피어 있었다. 분홍빛 물결이 능선을 타고 흐르고, 나는 그 속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철쭉이 흔들렸고,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봄을 느꼈다.
5. 유채꽃 -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 들판
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유채꽃이다. 벚꽃이 사라진 자리, 철쭉이 진 자리에 유채꽃이 피어난다. 유채꽃이 피는 곳은 넓다. 바람이 불면 노란 물결이 넘실거린다.
나는 유채꽃을 보기 위해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의 유채꽃은 섬의 바람과 함께 피어난다. 서귀포의 가파도, 성산 일출봉 주변, 그리고 중산간 도로. 그곳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노란 꽃밭을 만날 수 있다. 유채꽃밭에 서면, 마치 노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봄이 이제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봄꽃 여행을 마치며
봄은 꽃과 함께 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꽃을 따라 길을 나선다. 매화의 속삭임을 들으며 봄을 맞이하고, 산수유의 노란빛을 보며 봄의 깊이를 느낀다. 벚꽃 아래에서 찬란함과 덧없음을 배우고, 철쭉의 부드러운 색감 속에서 따뜻함을 만난다. 유채꽃의 노란 들판을 지나며 봄의 끝을 마주한다.
꽃이 피는 곳에 마음이 머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을 안고 또 다른 봄을 기다린다. 어쩌면, 여행이란 그렇게 꽃처럼 피고 지는 것이 아닐까? 한순간 피어나는 봄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언젠가 다시 피어날 아름다운 순간들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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