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수필] 갑자기 떠난 여행

 

갑자기 떠난 어느 하루의 짧은 여행

 

겨울이 끝나갈 무렵, 문득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어떤 목소리가 나를 재촉했다. "떠나자, 일단 가보자." 삶이 버거울 때 우리는 이유조차 모른 채 그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곤 한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계획도, 목적지도 없이 차에 올라타 길을 떠났다. 목적 없는 여정이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마치 인생이란 것도 원래부터 그렇게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순간에는 준비와 계획이 아니라 단순히 지금 느끼는 마음에 따라 나아가는 용기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어디론가 흘러가듯 도착한 그곳은 낯설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보는 길이었는데도 어딘가에서 이미 만나본 것 같은 풍경이 나를 반겼다. 이 감각은 마치 오래전 꿈속에서 걸어본 길을 다시 마주한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겪는 모든 낯선 일들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어느 순간 익숙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어릴 적 기억 속에 묻어둔 작은 조각들을 하나둘씩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천천히 길을 걸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민들은 어느새 바람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주변 풍경이 나를 둘러싸며 말없이 위로해주는 듯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놓치고 있던 것들이 그곳에서는 생생하게 다가왔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잔잔한 웃음소리. 삶 속의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많은 불안과 고뇌들은 이런 단순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걷다 보니 마른 가지 끝에 작은 새싹이 돋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의 마지막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문득 그 새싹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 봄은 찾아온다." 삶의 어려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고통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곳에서 삶의 계절이 천천히 변화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찻잔을 감싸 쥐고 있자니, 그 온기가 손끝에서 마음속 깊이까지 전해져 왔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삶이란 어쩌면 이런 작은 여유를 놓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바쁜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만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 진짜 의미는 그 사이사이의 고요함과 여백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차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며 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음미했다.

 

시간이 흐르자 하늘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이 여행이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삶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대로 할 수 없다. 때로는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 마치 오늘의 여행처럼, 삶은 우리에게 갑작스러운 아름다움과 기적 같은 순간을 선사하곤 한다.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어느덧 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노부부, 뛰어다니며 웃고 있는 아이들, 산책 중인 강아지와 주인.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있었지만, 그 풍경 자체가 나에게 하나의 조용한 위안이 되었다. 삶이란, 어쩌면 이런 작은 순간들의 모음일 것이다. 대단한 사건이나 성공이 아니라, 그저 소소한 행복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하나의 긴 여정. 우리는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 창문을 살짝 열어 얼굴로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바람은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에 남아 있던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 속에 아주 희미한 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떠날 때의 무거움은 어디로 가버리고 없었다. 여행이란 결국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 우리는 조금 더 가벼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나는 오늘의 여정을 되새겼다. 그 순간순간들이 마치 내 삶 속에 작은 흔적으로 남아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의 반복 속에서 쉽게 지치고 길을 잃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필요하다. 준비되지 않은 여정이 오히려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과 깨달음을 안겨준다. 삶의 길 위에서 우리는 때때로 새로운 시선을 얻고, 그 시선이 우리를 더 나은 내일로 이끌어 준다.

 

그날의 여행은 단순히 겨울 끝의 하루가 아니라, 나의 인생에 작은 쉼표 같은 순간이었다. 그 쉼표 덕분에 나는 다시금 내 삶을 이어갈 힘을 얻었다. 마치 계절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다. 갑작스러운 여행이 나에게 그것을 조용히 속삭여 주고 있었다.